에베소서

8월부터는 에베소서를 매일 묵상하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의 가장 위대한 서신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를 서신의 여왕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고,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2천년 전 감옥에서 쓰여진 이 편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장 풍성한 축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시작 두 구절을 통해 자신이 에베소서의 저자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투옥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와 함께 자신을 사슬로 묶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소망을 말씀을 통해 밝혔습니다(엡 6:19-20).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 편지를 썼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방의 다른 교회들이 읽을 수 있는 회람 편지를 의도하고 썼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서기 60-61년 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내용은 사도행전 끝 부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것은 사도행전 19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침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도 발견했으나,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해 증거했고, 그들은 마침내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19:1-7). 그런 다음 바울은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했습니다. 3개월여 간 이것을 지속했으나 반대자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북구하고 바울은 멀리 떠나지 않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그 곳으로 나왔습니다(행 19:8-10). 에베소에 있는 동안 바울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도록 귀신을 쫓기도 했습니다(행 19:11-20). 이것으로 일부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바울은 강제로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행 19:21-41). 그러나 기독교는 그곳에서 계속 성장했고, 바울은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행 20:17-38). 그는 에베소 교회를 사랑했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역사가 번창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13주 동안 연재될 에베소서 매일 묵상을 통해 에베소 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바울이 증거하고자 했던 말씀을 살펴보며 그 깊이와 넓이를 만끽하시는 성도 되기를 축복합니다.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

5월부터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말씀을 함께 나누며 묵상해 왔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야고보서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차이점과 함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에 대해 잠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언뜻 보기에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는 정 반대의 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고, 야고보는 믿음이 실재함을 입증하기 위한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이렇게 내용 상의 접근 방법이 다를 뿐, 실제로는 이들의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또한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만 구원이 열매맺는 것이라는 내용을 우리는 이 두 권의 서신서를 통해 보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운 후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필요한 할례와 의식에 대한 순종을 설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구원의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만을 믿는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을 폄하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강조하는 것들이 구원에 불필요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자랑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이복 형제로, 예수님의 지상 사역동안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요 7:3-5). 그는 부활 후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행 1:14; 고전 15:7).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실용적인 명령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가 종종 언급했던 잠언처럼 그의 편지는 일상 생활, 또 연습들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 혀를 제어하는 방법,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등과 같은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또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와,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중요한 주제 역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라는 격려로 자신의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야고보서는 강하면서도 확신을 주는 글이며, 동시에 실용적인 글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의 복잡한 관계는 아마 루터의 글에서 잘 나타나지 않나 생각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그는 갈라디아서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행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겪은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피력합니다. 반면, 야고보서를 향해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더 무거운 책(루터의 생각에)과 비교하여 지푸라기밖에 안되는 책이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향한 여정에서 쏟은 수고와 노력에 대한 강조로 인해 생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는 절대로 모순되는 두 권의 책이 아닙니다. 단지 이 두 서신서는 다른 관점에서 구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말했고, 야고보는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삶에 눈에 띄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경쟁자가 아닌, 진리의 복음을 위한 동반자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와, 계속되는 야고보서 묵상을 통해 더 깊이있는 복음의 진리를 맛볼 수 있는 교우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에 관한 단상

기도에 관한 단상

이번 주일부터 5주간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기도생활을 말씀을 통해 점검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명확하게 알려주신 바와 같이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도 기도하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어떤 형태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기도가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구분되지 않는다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남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인 Albert Mohler는 그의 저서 The Prayer that turns the World Upside Down 을 통해 신자가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 기도는 자신을 나타내는 창조적인 방법이 아니다.
  2. 기도는 하나의 치료법(테라피)이 아니다.
  3. 기도는 무엇인가 일어나게 하거나, 혹은 누구를 설득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4.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뉴스 리포트가 아니다.
  5. 기도는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종종 저지르는 이런 실수들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기도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온전하고 올바른 대화의 장을, 교제의 장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시작된 5주간의 대 장정을 기대해 주시고,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COVID-19 관련 업데이트

COVID-19 관련 업데이트

COVID-19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은 “사람이 많지 않은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 CDC(질병통제예방센터)가 권고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장소에서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주의해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CDC 에서는 행진이나 스포츠 경기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실외행사, 실외 행사, 또는 미장원/이발소나 쇼핑몰, 영화관, 교회 등 종교시설 같은 실내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라고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야외에서의 mask-free 일 뿐, 여전히 계속해서 주의해야 함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주변에서 듣고, 또 경험하신 바와 같이 COVID-19는 매우 전염성이 높습니다. 이제껏 믿음으로 기도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며 조심했지만, 아차하고 방심하는 사이 우리도 모르게 걸릴 수 있는 질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범이 되며 건강하고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에 유의해 주시고, 교우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의 경우 2차 접종 후 2주가 지났을 때, 존슨 앤 존슨 백신의 경우 접종 후 2주가 지났을 때 면역이 생긴 것으로 간주됩니다. 모든 교우들의 접종이 끝난 후 2주, 그 즈음 CDC 의 더욱 긍정적인 발표를 기다리며, 자유로운 예배를 고대하며 조금만 더 기도하고 인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참조: https://www.cdc.gov/coronavirus/2019-ncov/daily-life-coping/participate-in-activities.html#print)

하나님의 섭리; 신앙인도 병 걸리고 아픕니다.

하나님의 섭리; 신앙인도 병 걸리고 아픕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길어져 가면서 신앙의 탈을 쓴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신념이 기독교인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다. 이런 신념은 자신에게 해가 될 뿐만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와 공동체에 전염성 질병을 옮기고, 또한 그들의 신앙도 잘못된 신념에 물들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모두가 올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자 몇 글자 적어봅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현장 예배를 진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속한 커뮤니티, 혹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의 거주지에 따라 각각의 사정과 형편에 맞게 우리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것입니다. 현장 예배를 여전히 드리는 교회도 있고, 우리 교회처럼 당분간 중단한 교회도 있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 지역 만의 일은 아닙니다. 미주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각 주 및 카운티마다 각각의 상황에 맞게 제한 조치들이 발효되어 있고, 교회 역시 거기에 따라 각각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장예배 하면 절대 코로나가 걸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념이 성도들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러한 신념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신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사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당신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운영하시는 분이십니다. 온 피조물을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조화롭게, 질서있게 운영하십니다. 오늘은 해가 떴다가 내일부터 며칠간 해가 뜨지 않고, 다시 해만 뜨는 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모든 것이 그 뜻대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밥을 오래도록 먹지 않으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떡을 먹고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떡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고 그 연수가 다 되면 원래 온 곳인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연약해 지고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주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며 예배 생활에 열심을 다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현장 예배를 고집하며 방역과 개인위생을 소홀히 한다면 당연히 질병에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을 기적이라 말합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모든 질서를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뜻이 있기에,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에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매우 기이하고 특이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이적의 케이스를 성경은 그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범하신 행동, 치료하심과 일으켜 세우심의 모든 것들은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주 이심을 보이기 위한 사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당신의 뜻에 따라 질서와 조화 가운데 운영하시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이러한 잘못된 신념은 우리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기도와 말씀, 예배와 모이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질서와 조화 가운데 운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구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반석과 같은 변치 않은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와 사랑을 힘 입어 오늘도 확신 가운데 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도 예배에도 힘 쓰면서 동시에 질병에 노출되었을 때 연약한 우리 자신 역시 조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가 현장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보다 더욱 더 철저하게 마스크를 사용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사는 지역의 확산세도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도하며 조금 더 주의하고 말씀 가운데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사시는 교우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심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를 바라볼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살아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채 교만하여 방자히 행하면 오히려 당하지 않을 어려움과 시험에 빠져 고난을 겪게 될 따름입니다.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라 착각하지만, 도리어 그런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슬픈 도구만 될 뿐입니다.

늘 말씀 가운데 뿌리내린 좋은 신앙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사람 됩시다!

아멘, 그 말씀이 맞습니다.

아멘, 그 말씀이 맞습니다.

아멘은 확신이나 긍정을 선언하는 말, 혹은 송영이나 기도에 동감하는 마무리 감탄어로 사용되어 온 히브리어이다. 아멘은 일반적으로 진실로, 확실히, 그렇게 되길 원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믿을 만한, 신뢰할 만한, 확고한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어원상으로 아멘은 진실(emeth), 신뢰할 수 있음(emunah)와 연관되어 있다.

미국 감리교회 목사이자 전 캔자스 시티 시장인 Emanuel Cleaver 의 “Amen and A-woman” 발언은 이러한 성경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기독교적 배경이 전혀 없었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심지어 그는 미국 감리교 목회자였다.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정치 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시는 대상에 대한 몰 이해와 함께 기도의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되자 그는 이후 새 의회를 섬기게 될 기록적 숫자의 여성 의원들을 인정하고 세워주기 위한 발언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기도 내용 속에 그런 내용을 포함시켰다면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변명치고는 너무 궁색하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조차 쇼 거리가 되어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대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 오히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나의 기도 자세를 다시한 번 돌아볼 때다. 주여!